Recorder & Life Story
종교음악은 종교성과 무관할까? 본문
종교음악과 종교성은 관계가 있을까, 없을까?
엉뚱한 질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모 연주회를 감상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질문은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A라는 아버지에게는 B라는 아들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B가 아닌 C가 와서 A 앞에서 "우리 아버지는..키도 크고, 잘 생겼고, 배도 좀 나왔어." 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A는 황당하다. 자기 아들도 아닌 C가 와서 자기를 아버지인양 얘기하기 때문이다.
C가 A에 관해서 "우리 아버지는..." 이라고 말을 하려면 C는 A가 자신의 아버지여야 한다.
종교음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여기서 종교음악은 일단 기독교에 국한시켜 놓고 말하고자 한다.
고음악, 바로크 시대를 포함한 그 이전 음악들은 이 기독교라는 종교와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 음악들은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으로 구분 지어지곤 하는데,
세속음악일지라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따른 종교성이 종종 묻어나곤 한다.
사실 당시의 종교는 하나의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종교와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닌, 일상적인 삶 자체가 종교적인 것이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의 노래에도 종교적인 진정성이 담겨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노래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았을 것이다.
오늘날 바로크와 그 이전 중세, 르네상스 음악들이 복원되고 불려진다.
이젠 연주회에서 수난곡, 오라토리오 등을 비롯해 종교적인 감흥이 짙은 음악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 음악 속에 담겨진 종교성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불교신자일지라도 이런 음악들을 부르고, 또 듣는다.
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과연 음악은 음악일 뿐일까?
아무리 단순한 음악일지라도 그 음악 안에는 메세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노래들, 동요나 심지어는 만화 주제가에도 메세지는 담겨 있다.
그래서 음악 때문에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특정 음악을 듣고 자살로 이어졌다는 뉴스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될 것이다.
바흐는 그의 자필보에 'Soli Deo Gloria(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글귀를 사인처럼 남겼다.
바흐 또한 인간이기에 세속에 물든 모습들도 갖고 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런 형태로 표현했다.
그가 남긴 칸타타, 수난곡들은 요청에 의한 것도 있고, 필요에 의한 것도 있었다.
그에겐 이런 작업들이 업무와도 같은 일이었기에 모든 작품에 그의 열정적인 영성을 담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신 앞에 내려 놓고자 하는 노력을 했고,
때문에 그의 작품들을 통해 오늘날의 사람들도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그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주체자들에게 이런 영성이 없다면,
신을 향한 열망과 믿음이 그 안에 자리잡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면
음악적인 감동은 줄 수 있을지라도, 음악이 담고 있는 진정한 메세지의 전달과 함께
그 음악 속에서 신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어쩌면 잘 조련된 전문 합창단의 노래를 통해서도 느끼기 어려웠던 종교적 감동을
'떼제의 노래' 같은 아마추어들의 노래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런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비종교인, 비기독교인들은 종교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노래하고 있는 그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데도 노래할 수 있을까 라는
엉뚱한 의문점에서부터 시작된 개인적인 긁적거림일 뿐이다.
사실 이 의문이 시작된 발단은 모 연주회 때문이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지는데,
개신교 신자인 사람이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
과연 저럴 수 있을까...라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전개된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 노래를 부르기도, 거부하기도 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어서...
뭐...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엉뚱한 질문이다. 하지만, 얼마 전 모 연주회를 감상하면서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이 질문은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A라는 아버지에게는 B라는 아들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B가 아닌 C가 와서 A 앞에서 "우리 아버지는..키도 크고, 잘 생겼고, 배도 좀 나왔어." 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A는 황당하다. 자기 아들도 아닌 C가 와서 자기를 아버지인양 얘기하기 때문이다.
C가 A에 관해서 "우리 아버지는..." 이라고 말을 하려면 C는 A가 자신의 아버지여야 한다.
종교음악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여기서 종교음악은 일단 기독교에 국한시켜 놓고 말하고자 한다.
고음악, 바로크 시대를 포함한 그 이전 음악들은 이 기독교라는 종교와 상당히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일반적으로 그 음악들은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으로 구분 지어지곤 하는데,
세속음악일지라도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따른 종교성이 종종 묻어나곤 한다.
사실 당시의 종교는 하나의 일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종교와 삶이 분리된 것이 아닌, 일상적인 삶 자체가 종교적인 것이었다.
물론 당시 사람들의 노래에도 종교적인 진정성이 담겨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노래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알았을 것이다.
오늘날 바로크와 그 이전 중세, 르네상스 음악들이 복원되고 불려진다.
이젠 연주회에서 수난곡, 오라토리오 등을 비롯해 종교적인 감흥이 짙은 음악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이 음악 속에 담겨진 종교성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나, 불교신자일지라도 이런 음악들을 부르고, 또 듣는다.
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과연 음악은 음악일 뿐일까?
아무리 단순한 음악일지라도 그 음악 안에는 메세지가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노래들, 동요나 심지어는 만화 주제가에도 메세지는 담겨 있다.
그래서 음악 때문에 사람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특정 음악을 듣고 자살로 이어졌다는 뉴스는 이런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될 것이다.
바흐는 그의 자필보에 'Soli Deo Gloria(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글귀를 사인처럼 남겼다.
바흐 또한 인간이기에 세속에 물든 모습들도 갖고 있지만, 적어도 그는 자신의 소망을 이런 형태로 표현했다.
그가 남긴 칸타타, 수난곡들은 요청에 의한 것도 있고, 필요에 의한 것도 있었다.
그에겐 이런 작업들이 업무와도 같은 일이었기에 모든 작품에 그의 열정적인 영성을 담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을 신 앞에 내려 놓고자 하는 노력을 했고,
때문에 그의 작품들을 통해 오늘날의 사람들도 '은혜'를 받는다.
그런데, 그 음악을 노래하고 연주하는 주체자들에게 이런 영성이 없다면,
신을 향한 열망과 믿음이 그 안에 자리잡지 않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면
음악적인 감동은 줄 수 있을지라도, 음악이 담고 있는 진정한 메세지의 전달과 함께
그 음악 속에서 신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어쩌면 잘 조련된 전문 합창단의 노래를 통해서도 느끼기 어려웠던 종교적 감동을
'떼제의 노래' 같은 아마추어들의 노래들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도 이런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비종교인, 비기독교인들은 종교음악을 연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자신이 노래하고 있는 그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데도 노래할 수 있을까 라는
엉뚱한 의문점에서부터 시작된 개인적인 긁적거림일 뿐이다.
사실 이 의문이 시작된 발단은 모 연주회 때문이었다.
오늘날 기독교는 카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지는데,
개신교 신자인 사람이 성모 마리아를 찬양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
과연 저럴 수 있을까...라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전개된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따라 노래를 부르기도, 거부하기도 해야 하는게 아닐까 싶어서...
뭐...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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